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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name.info :+: 정몽주(鄭夢周) - 연일정씨(延日鄭氏)

 

 정몽주 (鄭夢周)

 [ 1337년(충숙왕 복위 6) ∼ 1392년(공양왕 4) ]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초명는 몽란(夢蘭) ·몽룡(夢龍).
   시호(詩號)는 문충(文忠).
   경북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 ·수찬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彦陽)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구주(九州)]의 지방장관 이미가와에게 가서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락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민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 보문각 제학 지제교를 거쳐,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법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보문각 제학 상호군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에 봉해지고,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1387년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했으며,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가서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렸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芳遠, 태종)에 의해 격살되고 말았다.
    19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李成桂)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李成桂)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했으며 불교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특히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연일정씨(延日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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